◇기술의 진보 이면에 가려진 인간의 고립과 갈증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연결성이 높고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깊은 정서적 갈증을 겪고 있다.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자극은 뇌를 끊임없이 각성시켜 극심한 피로를 유발하고, 인공적인 콘크리트 환경은 인간의 감각을 무뎌지게 만든다. 이처럼 디지털 문명이 안겨준 번아웃과 고립감 속에서, 현대인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태초의 것’, 즉 자연의 온기와 느린 호흡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여기, 삭막한 현대 도시의 일상 속에서 자연의 호흡을 고스란히 담아낸 소리와 색채로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는 예술가가 있다. 한국정가원 원장이자 천연염색 작가로 깊은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남계 박종순 작가. 그녀가 펼쳐 보이는 예술 세계는 단순한 전통의 재현을 넘어, 오늘날 지친 현대인들에게 건네는 깊은 생태적 치유의 메시지 그 자체다. 현대 사회가 직면한 정서적 공백 속에서, 그녀의 예술은 조용하지만 강력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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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음을 지우고 내면의 호흡을 깨우다, 정가(正歌)의 재발견
박종순 작가가 전하는 정가(正歌)는 오늘날의 빠른 비트나 자극적인 전자음향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예술이다. 인위적인 기교를 배제하고 오직 자신의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숨결을 길게 늘여 소리를 빚어내는 방식은, 그 자체로 고도의 명상 행위와 맞닿아 있다.
현대 사회는 무언가를 빠르게 성취하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여 주장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박 작가가 안내하는 정가의 세계는 소리 지르기를 거부하고 고요한 침묵과 절제를 요구한다. 과잉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절제와 고요는 때로는 낯설고 두렵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의 목소리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운 일상 속에서, 정가는 역설적으로 가장 단단하게 자신을 지켜내는 방패가 되어 준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오롯이 내면의 호흡 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마음의 엉킨 결이 차분히 가라앉고 잃어버린 평정심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정가는 소리를 쥐어짜거나 남보다 앞서려 하면 절대 아름다운 소리가 날 수 없다. 온전히 자신의 숨을 응시하고, 그 호흡의 장단에 마음을 맞출 때 비로소 비움의 미학이 완성된다. 현대인들이 매일같이 마주하는 소음과 정보의 과부하 속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진짜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치유가 일어난다”
그녀의 이러한 철학은 정가가 단순히 옛 선비들의 고루한 유희가 아니라, 복잡하고 어지러운 현대인의 영혼을 가라앉히는 가장 우아하고 고요한 정신적 처방전임을 역설한다.
◇쪽빛의 깊이와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염색화(染色畵)’
박종순 작가의 예술적 반경은 청각적 공간을 넘어 시각적 자연으로 다채롭게 확장된다. 수십 년간 천연염색 작업을 고수해 온 그녀의 손길은 대지에서 얻은 풀, 나무, 흙의 색을 천에 스며들게 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화학 안료가 주는 즉각적이고 인위적인 색감 대신, 수없이 물들이고 말리는 인내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발현되는 은은한 쪽빛과 자연의 색채들은 그 자체로 고결한 생태적 가치를 지닌다. 잡념이 섞이면 색이 탁해지듯, 염색은 곧 마음의 결을 다스리는 수행과 다르지 않다.
특히 이러한 천연염색의 깊은 채색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염색화(染色畵)’는 섬유 공예와 회화의 경계를 허물며 독창적인 미적 지평을 열어젖혔다. 귀로 듣는 소리의 결이 눈으로 보는 색채의 결과 만나 하나의 우주를 이루는 셈이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의 순환 속에 스며드는 천연염색의 작업 방식은, 생태계 파괴와 환경 위기를 우려하는 현대 사회에 예술이 건네는 조용하지만 묵직한 울림이 된다.
◇치유와 연대의 공간, ‘한국정가원’이 그리는 지속 가능한 미래
이처럼 소리와 색채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꾀하는 박종순 작가의 행보는 교육과 연대의 공간인 ‘한국정가원’과 ‘경기시조합창단’을 통해 더욱 단단하게 구체화되고 있다. 그녀는 우리 소리가 유리 장식장 안에 갇힌 고고학적 유물로 남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신 대중이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하고 체화할 수 있는 생태적 문화 예술의 장으로 폭넓게 확장하고자 한다.
특히 세대 간의 단절이 심화되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그녀의 배움터는 단순한 기예 전수를 넘어 정서적 연대를 회복하는 따뜻한 공동체의 거점으로 기능한다. 함께 모여 호흡을 맞추고, 자연의 색을 나누며 타인의 숨결에 귀 기울이는 과정 자체가 현대인들에게 사라져 버린 공동체적 온기를 되찾아주기 때문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그녀가 이끄는 공간은 잠시 숨을 고르고 본래의 리듬을 회복하는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도맡고 있다.
자연에서 채취한 친환경 물감으로 천을 물들이고, 자신의 호흡을 실어 정가를 읊조리는 이 일련의 과정은, 결국 인간이 가장 ‘인간답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도록 돕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소리와 빛깔로 건네는 다정한 위로와 여운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의 호흡을 돌아보는 일. 그것은 지친 현대 사회에서 예술이 건넬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치유일지 모른다. 속도와 효율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우리는 정작 우리의 내면과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가 얼마나 메말라 가는지 눈 감고 살아왔다.
“우리는 너무 빠른 속도로 앞만 보고 달리느라 정작 내 마음과 주변의 자연이 얼마나 지쳤는지 돌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내 손끝에서 피어나는 쪽빛 천 한 장과, 묵묵히 다듬어 낸 소리 한 자락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따뜻한 쉼터이자 다정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리로는 귀를 씻고, 자연의 색으로는 눈을 정화하며, 그윽한 정신으로는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예술가 남계 박종순. 자극적인 속도 경쟁에 지친 현대 사회에서, 그녀가 묵묵히 걸어가는 이 길은 우리가 앞으로 회복해야 할 진정한 삶의 미학과 치유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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