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의 안식처, 한국서화관에서 피어난 치유의 미학
성북동 길상사 주변의 고즈넉함과 북악산 자락의 정취가 마주하는 한국서화관. 얼마 전 이곳에서는 우향(雨香) 김동애 작가의 개인전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문을 닫은 전시장에는 한지의 수묵 향과 작가가 전한 따스한 여운이 여전히 짙게 남아있었다.
문인화의 전통적 격조 위에 현대인의 체온을 얹어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온 김동애 작가를 현장에서 만나, 그가 걸어온 묵향의 길과 그 끝에서 피어난 치유의 미학을 짚어보았다.
“오랜 세월 품어온 고양이들과의 기억이 화폭을 통해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해진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다. 내 그림이 누군가의 지친 마음을 토닥이는 작은 쉼터가 되었기를 바란다”
◆전통의 격조와 현대적 페르소나가 만난 고양이의 화폭
예로부터 문인화는 사대부와 선비들이 여백의 미와 절제된 붓질 속에 자신들의 학문적 인품과 사상을 담아내던 영역으로 여겨졌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로 대표되는 사군자나 기암괴석, 불로초 같은 상징적 오브제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오랜 관습이었다.
그러나 김동애 작가의 화폭 속 고양이들은 이러한 전통적이고 정형화된 틀을 과감하게 깨부순다. 전통 문인화가 지닌 특유의 기품 있는 서예적 필선과 깊이 있는 먹색, 그리고 화면 여백이 주는 쉼표를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그 안에는 맑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당당하게 자리 잡은 현대적 오브제로서의 고양이가 숨을 쉬고 있다. 동양화의 예리한 선 맛과 수묵 담채의 부드러운 스며듦 위에 얹어진 고양이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은 동물의 외형적 묘사를 넘어선다.
그것은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내면 풍경이자, 오랜 세월 붓을 쥐어온 작가 자신의 솔직한 페르소나를 대변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전통 문인화의 보수적인 벽을 허물고 고양이라는 친근한 소재를 끌어들인 그의 작업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나, 이 시도는 결코 찰나의 흥미나 대중적 타협이 아니라 치열하게 다져온 전통 회화의 탄탄한 기공과 삶의 궤적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묵향 가득한 집안과 대가들 아래서 다진 탄탄한 필력
김동애 작가의 예술적 근원은 묵향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집안 분위기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대한민국 한글 서예계의 대가인 어머니(규당 조종숙)의 영향 아래, 그는 불과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다.
집안 벽면마다 걸려 있던 먹글씨들과 국전 출품작을 고르던 모친의 곁에서 어린 김동애 작가는 이미 예술적 직관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1960년대라는 시대적 궁핍함 속에서도 어릴 때부터 미술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고, 각종 어린이 미술대회를 휩쓸며 일찍이 작가로서의 싹을 틔웠다.
중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홍석창 선생을 찾아가 사군자를 치며 먹의 기본을 익혔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미술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당대 동양화 대가들의 가르침을 흡수하며 성장한 그는 우현 송영방 선생에게 동양화의 운치와 기법을 배웠고, 백계 정탁영 선생에게는 정밀한 데생과 회화적 기초를 체계적으로 사사했다. 이후 동덕여대 회화과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 인물화를 중심으로 삼아 인체의 골격과 형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단단한 필력을 구축해 나갔다.
◆육아 공백과 일사 구자무 선생과의 만남을 통한 문인화 입문
대학원 졸업 후 결혼과 육아라는 삶의 전환기를 맞이하면서,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던 붓을 잠시 내려놓아야만 했던 시기도 있었다. 3~4년간의 육아 공백기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가져다주기도 했으나, 이 시기를 지나 다시 먹을 잡게 된 것은 작가로서의 삶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
굳은 손을 풀기 위해 찾아간 문인화의 세계에서 그는 일사 구자무 선생을 만나며 인생의 커다란 모멘텀을 맞이한다. 인물화와 서양화적 데생력을 완벽하게 갖춘 그의 바탕은 문인화단에서 독보적인 빛을 발했다. 대개의 문인화가들이 서예나 글씨에 치중하느라 회화적 데생력이 약했던 반면, 김동애 작가는 수묵의 붓질과 정밀한 형태감을 결합해 냈기 때문이다. 스승의 극찬 속에 문인화에 입문한 그는 1999년 대한민국 문인화 특별대전 대상을 거머쥐며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통 문인화의 거장으로서 화단을 지켜왔다.
◆매너리즘에 빠진 문인화, 그리고 길 위에서 마주한 생명들
그러나 수십 년간 정형화된 사군자와 난초, 관념적인 산수를 그리며 지켜온 문인화의 세계는 어느 순간 그에게 깊은 매너리즘을 안겨주었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전통 문인화의 본질은 점차 고경(古經)을 읽는 문인 사대부가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그 맥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고, 젊은 대중이나 현대 화랑가와 격리되는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전통의 숭고한 본질과 필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문인화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뇌가 시작된 지점이다. 그 고뇌에 답을 내어준 것은 다름 아닌 그가 길 위에서 마주친 작은 생명들이었다.
40대 시절, 김동애 작가는 동네 길가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거나 상처 입은 길고양이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하나둘 보살피기 시작했다. 장마철 비구름 속에서 떠내려가는 새끼들, 한겨울 얼어붙은 보도블록 위에서 병들어가는 고양이들을 보며 그는 밤마다 밥을 들고 나갔다. 때로는 아픈 아이들을 직접 구출해 병원에 입원시키고 치료하여 집과 화실로 품어 안았다. 그렇게 시작된 길고양이 구호활동은 10년 넘게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최대 일곱 마리의 고양이들과 한 지붕 아래서 동락하는 인연으로 발전했다.
◆23년의 세월이 빚어낸 예술적 승화와 ‘나의 사랑 고양이’전
2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양이들과 삶과 죽음을 함께하며 관찰한 그들의 표정과 시선, 동작은 작가의 화폭 속으로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오랜 세월 인물화를 전공하며 생명체의 동세를 포착하는 데 탁월했던 작가는 고양이라는 매개체를 만나 폭발적인 시너지를 냈다. 말없이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고양이들의 미세한 눈빛과 귀의 각도, 꼬리의 움직임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 고독과 휴식, 그리고 위로의 감정을 똑같이 읽어냈다. 또한 조선 시대 장수를 기원하며 그리던 전통 ‘모질도(耄耋圖)’의 격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꽃밭 속에서 나비를 바라보는 행복한 고양이의 형상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한국서화관 개관 기념전으로 펼쳐졌던 ‘나의 사랑 고양이’전은 작가의 이러한 오랜 인연과 철학이 결실을 본 성과였다. 수묵과 고양이의 이색적이고도 따뜻한 조화를 담은 이번 전시는 관람객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젊은 MZ세대는 물론 K-컬처에 매료된 외국인 관람객 및 유명 글로벌 아이돌 멤버까지 발걸음을 옮겼으며, 열띤 호응에 힘입어 전시 기간이 한 달 이상 연장되기도 했다.
◆묵향 속에서 피어난 위로, 대중과 호흡하는 문인화의 찬란한 지평
경기대학교 서예과 초빙교수, 한국문인화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화단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온 김동애 작가는 자신의 삶과 예술을 되돌아보며 “수고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고 나직이 말했다.
길 위에서 아파하고 배고파하던 작은 생명들에게 내어준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손길이,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자신에게 가장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예술적 영감이 되어 돌아왔다는 뜻이다.
화폭 위에서 노니는 고양이들은 삶의 수많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견뎌낸 작가의 분신이자, 각박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위로의 존재들이다. 전통의 깊은 묵향 속에서 자유롭게 거니는 김동애 작가의 고양이들은, 문인화라는 장르가 오늘날 어떻게 대중과 호흡하며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지 그 찬란한 지평을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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